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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에게 이별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재회를 고하다

박완서 『노란 집』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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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장에 붙어서 하는 독서, 옆으로 삐딱하게 누워서 더운 계절에는 차가운 방바닥에 추운 계절에는 뜨신 방바닥에 붙어서 하는 독서, 참으로 방구석의 방바닥이야말로 독서 잡식가가 있을 곳이다. 방구석의 방바닥이라니 폐소공포증 환자라면 단숨에 협심증에 걸릴 것 같은 지명이다. 그러면 11월 하반기의 방구석 독서 몇 권과 11월 방구석상을 수여해 보자.

요즘 생각지 못하게 지방에 머물고 있다. 나그네 신세면 곤란한 것이 책이 없다는 것인데, 지역 주민에게는 한 번에 3권까지의 책을 빌려 주는 이 지역 대학의 고마운 방침으로 대학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우아한 습관의 독서가들도 있지만 나에게 책은 오로지 방구석이다. 구들장에 붙어서 하는 독서, 옆으로 삐딱하게 누워서 더운 계절에는 차가운 방바닥에 추운 계절에는 뜨신 방바닥에 붙어서 하는 독서, 참으로 방구석의 방바닥이야말로 독서 잡식가가 있을 곳이다. 방구석의 방바닥이라니 폐소공포증 환자라면 단숨에 협심증에 걸릴 것 같은 지명이다. 그러면 11월 하반기의 방구석 독서 몇 권과 11월 방구석상을 수여해 보자.

특별순서로 박완서 고별전도 있다. 당장 옆에 있는 책들을 돌아보니 다나베 세이코의 『서른 넘어 함박눈』, 오쿠다 히데오의 『소문의 여자』, 박완서의 『노란 집』, 영국문학과 작가를 다룬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 등등이 있는데 11월 방구석상은 웬디 웰치의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에 돌아간다. 이 책이야말로 방구석의 방바닥에서 하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독서가와 애서가의 사랑을 받을 만한 책이다. 책 뒤편의 김경 작가가 쓴 추천사에 낚여서 집어들었다가 엄마까지 읽게 하고 반납했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싫어할 수 없을 것이다.

무대뽀 용기로 헌책방 차린 이야기와 『클라리사』 같은 고전에 대한 정당한 험담(길이로 원고료로 받았을 거야!)까지 알토란처럼 꼭꼭 들어찬 이런 책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담. 지금 이 페이지에 들어온 분이라면 꼭 읽어 보시길. 별로 안 유명한 사람이 책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떠들고 있는 이런 페이지를 클릭할 정도의 애서가시라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말해 뭘해, 입만 아프지. 그냥 읽으세요, 후회 안 하실 테니까. 짝짝짝. 웬디, 수고하셨어요. 오랜만에 읽고 있는 동안 책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경험이었어요.


장원보다 내가 받은 이 달의 충격 중 하나는 박완서다. 아무래도 이제는 박완서를 그만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나도 말하면서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노란 집』을 읽고 나서 이제는 박완서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마침내 든 것이다. 어떤 생각인고 하니, ‘이제는 그만!’이라는 다섯 글자다. 박완서가 싫어졌냐고? 그럴 리가, 박완서의 글은 싫어하거나 좋아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남한 사람이 어떻게 박완서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나는 우리 어머니를 싫어해요, 나는 우리 할머니를 싫어해요, 나는 우리 이웃들을 싫어해요, 우리 옆집 할머니 짜증나요, 이런 말과 비슷하다. 박완서를 싫어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열심히 살았던 어른들 이야기가 싫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웃집 이야기가 싫다고 공식적으로 밝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웃집에 착하고 음전하고 귀엽고 발랄한 할머니가 사는데 나는 저 할머니가 싫고 짜증난다는 말과 같다.

나는 그 할머니가 싫고 짜증나지는 않지만 이제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박완서를 싫어해서는 안 되고 싫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가 ‘보통 사람’들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갖는 딱 그만큼의 악의, 그만큼의 현실 감각. 이게 박완서의 에세이에 자주 나타나는 것인데 나는 옛날부터 여기에 이상하게 어떤 독성이 느껴졌다. 누구에게는 독성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게 나에게는 어쩐지 있는 그대로의 어떤 착함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나에게는 이게 독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다들 박완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무독성 때문인데, 『노란 집』을 읽은 후 그 동안 이십년 가까이 박완서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유독하다고 느꼈던 어느 지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 박완서의 글을 읽고 나면 나도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다, 사람이 다 그렇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게 사람이 돈독이나 성공에 대한 독이 오른 상태라면 그걸 바늘로 콕 찔러 바람이 좀 빠지게 해 주지만 그것과 전혀 정반대에 있을 때는 박완서가 말하는 지극히 보통 사람들조차 좀 겁이 난다. 돈이나 성공과 지금 내가 어쩌면 지나치게 거리가 먼 상태라서 그런지, 박완서의 글에서 보통의 상태라고 동의하고 시작하는 그 상태들을 도저히 보통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고 자꾸 그걸 어정쩡하게 보통이라고 동의하게 되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돼지본드라도 들이킨 것처럼 이상하게 뒤틀리는 기분이 든다. 잘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기 때문에 억지로 마음에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을 끄집어서 늘어놓아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어떤 독서를 하다 보면 나 자신을 여기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이제는 그 세계의 가치에 동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기가 꽤나 애매한 것들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뭔가가 이제 그만이라고 호루라기를 분 모양이다. 가족이나 피붙이에 대한 그 끈적끈적한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은 이제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다. 그 사랑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에게 주어지기 좀 어려운 것들이라 나를 좀 다른 곳에 옮겨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체에 무해한 재미가 좀 필요한데, 박완서의 에세이와는 별개의 문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를 읽고 나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제 됐어, 그만! 하고 외친 것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다.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인지 방황인지를 한참 따라가다가 내 머릿속의 뭔가가 하루키 소설은 이제 됐어, 지겨워, 그만! 이라고 외친 다음 나는 순순히 항복했다. 흐리멍텅한 걸 싫어하다 보니(그렇다, 이게 우아한 취향은 아니다. 늘 여운을 즐길 줄 모르는 독서를 한다고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책의 앞뒤를 넘겨 보며 이거 1부 아니야? 하고 의심을 하다 말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IQ84』 가 어떻게 됐는지 내가 아직 모르듯 다자키 쓰쿠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나는 아마 앞으로 모르겠지, 그런데 알아? 이제 관심도 없어! 앞으로 뭔지 잘 모를 이야기들을 읽으려고 찡찡대는 남자애들이 찡찡대는 이야기들을 읽는 건 이제 딱 질색이야, 하고 결론을 내렸는데 의외로 얇은 에세이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를 읽고 나서 기분이 유쾌해졌다.

21세기 초반 무렵이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오십 무렵에 패션지 《앙앙》에 연재한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불태워진 브래지어들을 떠올리며 브래지어들은 하루하루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하고 브래지어를 가엾게 여기거나 집안의 업소용 냉장고에 좋아하는 크로켓을 대량으로 만들어 냉동해 두었다가 수리기사를 부를 수 없는 주말, 오필리어처럼 슬프게 녹아가는 크로켓을 이틀에 걸쳐 장렬히 먹어치운 나머지 끝내 크로켓들에게 단체 폭행을 당하는 꿈을 꾸고 말았다는 이런 글들은 하루키 에세이의 정수다. 뭐랄까, 너무나도 인체에 무해한 재미가 있다. 그래서 다자키 쓰쿠루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날뛰던 적대감을 순식간에 거두어들이고, ‘하루키는 이제 딱 질색이야’에서 ‘하루키 소설은 여전히 질색인데 에세이는 언제나 귀엽지 인체에 무해하고, 드문 재능이야’로 생각이 얼른 바뀌었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소설가를 오랫동안 꿈꾸면서도 소설가가 못 되었으므로 그 기분을 모르는데, 그 사람 에세이는 좋아, 근데 소설은 별로야. 이런 소리를 듣는 작가는 기분이 어떨까? 그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놓는지 하찮게 놓는지가 여기에서 그가 화를 내는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관련 기사]

-한국 문학의 아름다운 산맥, 박완서를 만나다
-작가 박완서의 미발표 소설이 수록된 『노란집』
-故 박완서 작가의 삶과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대표작 7
-하루키 소설 속, 색채를 읽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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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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